부산극동방송목회칼럼(three)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참을 수 없는 목회의 가벼움

아무 상처도 없는 목사인 양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적인 목회의 비법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은,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목회를 해야 성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매순간마다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줄 알고, 마치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행세를 해야 그것이 은혜받은 목사의 모습이고, 능력 있는 목회자의 스타일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런 목사들에게 사람들이 몰리기도 합니다. 언제나 성령충만한 목사를 원하지 않는 교인들은 없을 것입니다. 나도 그런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솔직함을 가장해서, 나의 못남을 감추려고 하는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체코출신의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에서, 현대인의 삶의 양태를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똥은 악보다도 더 다루기 힘든 신학적 문제'라고 합니다. 악은 인간의 책임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똥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볼수록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는 말 같이 여겨집니다. 그의 말마따나 현대인들은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어서 자신의 존재의 똥됨, 인생의 추함을 순간적으로 처리해 버림으로써,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쓸데없는 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쿤데라는 '키취'(kitsch)라는 독일어로 표현하였습니다. '저속', 혹은 '속물'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목회에도 이런 속물, 저속한 목회가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ì–´ë–¤ 분들에게 욕을 많이 먹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그런 목회자에 속하지 않는 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말입니다. ì–´ì©œ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이런 저속한 속물적 목회를 지향(지양이 ì•„ë‹Œ)하는 심정들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공'이란 말 속에는 자칫 이런 '키취'의 냄새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의 ‘성공’을 위해서, 나의 연약함이나 추함은 말할 수도 없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승리적 삶 만이 나에게서 풍겨야 합니다. 아멘, 할렐류야!ê°€ 나의 브렌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공의 길입니다.

소위 말하는 ‘줄초상’을 겪을 때에 저는 때때로 이런 ‘키취’의 곤혹감을 갖습니다. 유족들이 당하는 깊은 슬픔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ë•Œ, 저는 어느새 위선자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의 의미를 깊히 묵상하고 새기면서 저들의 슬픔, 어쩌면 단 í•œ 번 뿐일 그런 슬픔들에 삼일교회 samil.org 동참하기 전에, ê·¸ 죽음이 너무나도 일상화되어 버린 ê·¸ 습관으로 그들의 초상에 참예하는 것은, 그것도 장례를 주례하는 자의 입장에 서는 것은, 참으로 삼일교회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슬픈 일을 애써 연상하면서 눈물을 쥐어짜는 연예인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눈에 안약을 넣어서라도 눈물을 함께 흘려야 하는 것일까? 세련된 전문적 직업인으로서 성공해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 성공은 구역질이 나게 합니다. 이럴 때에 자신의 가벼움을 탓하는 목회자는 무거운 목회를 하는 자일 것입니다. 자신의 가벼움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정말, 견딜 수 없도록 가벼운 목회를 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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